사물과 소리로 만든 시청각적 풍경
김해주(큐레이터)
말의 내용보다 그 말을 전달하는 목소리나 말의 속도, 말을 시작하고 끊는 간격과 공백 등과 같은 부수적인 것들에 예민해질 때가 있다. 이 같은 말의 담음새는 때로 말의 의미가 전달하는 정보 이상의 맥락을 전달하거나 암시해주곤 한다. 말에서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제외한 이 같은 다층적인 정보는 말의 장면을 이룬다. 시각예술은 그 단어가 지칭하는 바와는 달리 시각의 예술에 머물지 않는다. 시각 이상의 것들을 정보로서 읽어내고 그것이 전달하는 맥락의 풍경 전체가 ‘시각’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이처럼 다양한 감각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시각에 예민한 작업들이 많아지고 있고, 작가들은 소리나 촉각과 같은 감각의 일부를 추출하거나 작업의 재료로서 사용하는 일들이 더욱 많아졌다. 눈앞에 보이는 어떤 풍경이 컴퓨터 속 화면을 보는 것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온도와 바람과 냄새와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평면의 화면과는 다른 종합적 경험. 전시는 이처럼 여러 다층적인 감각이 결합되는 경험으로서 전개되어 가고 있다.
서혜순 작가는 2008년 이후 꾸준히 소리를 작업의 재료로 사용해오고 있다. 소리의 질감이나 가청의 범위 등 질료로서의 소리의 성질을 탐구하는 다양한 사운드 아트의 실험들이 이미 여러 작가들이나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되고 있지만, 서혜순 작가의 경우 기존에 존재하는 소리들을 채집하고 이를 조각이나 설치와 연계하여 소리를 가까이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사운드 아트와 조각의 영역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그의 설치에서 사물들은 형태적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기이한 조합들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들은 단순하고 경제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때로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다. 여기에 특정한 소리가 더해져 작업의 서사를 발생시키며 사물들은 대체로 소리를 뒷받침하는 지지체, 또는 소리를 지시하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 관객들이 소리에 시선을 돌리고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들에 가까운 것이다.
작가의 가장 최근작업인 <Op.50874>는 사물과 소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이다. 작가가 김해클레이아크 미술관의 레지던시에서 지내면서 만들고 전시한 작업인데, 도자기로 얇게 만든 LP판들이 나무 테이블 위에 쌓여 있고, 함께 놓인 플레이어에서 도자기 LP판 하나가 돌아간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작업을 둘러싸고 흘러나오는 소리는 LP판 위의 도자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아니라 이 도자기가 만들어진 작업실 공간에서 녹음한 말소리, 음악 소리, 공간의 소리 등이다. 채집한 소리들을 통해 불러내온 것은 곧 그 작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이다. 원래 음악을 만들어내는 LP판에서는 정작 그 기능을 삭제해버렸다. 소리와 연결되어 있는 사물의 일반적인 기능을 변형하고, 오히려 소리의 발생 원인이 되는 과거의 소리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작가는 보편적 인과관계와 사물의 기능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단절시킨다.
이번 신세계 갤러리 전시에서 소개하는 신작 <하모니>도 위와 같은 사물에 대한 기대를 소리를 통해 단절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소리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소리흡수 스펀지를 도자기로 캐스팅하여 존 케이지의 ‘무잔향실’의 일부를 재현한다. 이 도자기들은 흡음판의 형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리 차단의 기능이 없는 형태적 참조물인 셈이다. ‘무잔향’은 소리가 가진 잔향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방음 상태를 의미한다. 1957년 존 케이지는 ‘실험음악’이라는 글에서 공학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고요한 상태인 무잔향실에서의 경험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그는 무잔향실에서조차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하나 들었다고 한다. 높은 소리는 바로 자신의 신경체계에서 나는 것이고, 낮은 소리는 혈관에서 나는 것이었다. 존 케이지의 글은 완벽한 무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청자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리가 이미 존재하는 한, 소리의 정지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언급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작업은 흡읍판 형태의 이 도자기들을 굽고 식히는 과정에서 온도차로 발생한 소리를 녹음하여 설치와 함께 재생하고 있다. 도자기의 소성 과정에서의 소리를 마치 청자의 신경체계의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를 확대한 것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존재하는 소리에 대한 언급은 다른 여러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블랙박스>(2010)는 소리와 연계된 사물이지만 아무 소리도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의 사고의 기록에 대비해 항공기 조종석에 배치하여 말소리를 비롯한 여러 소리를 녹음하는 장치인 블랙박스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 사물이다. 이 블랙박스는 공간 한쪽에 놓여, 그곳의 소리들이 녹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칭하는 하나의 표시로서 작동한다. 가는 모래와 같은 백토 소재의 알갱이에 제목과 동일한 짧은 문장 ‘나는 듣는다’가 쓰여져 있는 2016년 작품 <I hear>에서도 작품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없다. 설치에 포함된 마이크는 백토 가까이를 향하고 있지만 전선은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I hear’라는 반어적 문장을 모래 위 글씨에 포함함으로써 작가는 특별히 작업의 일부로 송출하지 않아도 공간 내부에 이미 자리하거나 발생하게 되는 소리의 존재를 소환한다.
감각의 예민함과 경험적인 환기를 불러오는 서혜순의 작업은 그 소리 생성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한 입장이나 의견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허나 소리 없음의 상태를 하나의 소리로서 발견하는 현상적 체험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므로, 또한 일련의 작업들이 현상의 발견에 대한 변주로만 읽히지 않기 위해서, 작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동기에 대해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낼 필요도 있어 보인다. 어떤 사물이 소리의 존재와 특징을 지칭하게 될 때 그 사물이 선택되는 이유가 소리와 직접적인 연결이 있는 사물(흡음판, LP)이라는 것, 바로 즉각적인 연결성을 가지는 외에도 소리와 사물을 연결하는 다른 이유와 조합들이 생성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또한 작가 개인의 사적인 청취 경험을 어떻게 공동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기도하다.
몇몇 작업에서는 소리를 둘러싼 구체적인 상황과 사건이 드러나기도 한다. 예컨대 <즐거운 나의 집>은 어린 시절 혼자 집을 지키며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들에도 예민해졌던 작가의 청각적 트라우마를 반영한다. 인형의 집을 본 따 만든 도자기 집 속에서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와 화이트 노이즈가 재생된다. 차가운 사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의 결합이 은근한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고, 이는 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가를 암시하게 된다. 이번 전시의 신작 <소수를 위한 노스탈지> 역시 조금 더 사회적 맥락이 반영된 작업이다. 신세계 갤러리가 속한 백화점 건물의 장소의 특성에 기반한 이 작업은 작가가 살던 프랑스의 작은 도시의 라디오 방송을 번화하고 화려한 백화점의 방송 시스템에 개입시켜 낯선 순간들을 만들게 된다. 만일의 우연이 잘 작동한다면 누군가에게는 모국의 음악과 말소리를 만나는 순간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방송은, 타지에서 잠깐씩 마주치게 되는 모국의 언어와 소리들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의 감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수자의 위치에서 소리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작가는 한국에서 다른 이를 소수로 호명하게 되는 상황을 통해 소수자의 위치가 언제든 달라지고 또 전복될 수 있는 것임을 알린다.
서혜순 작가의 작업은 소리 그리고 이에 연결되는 사물들을 통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소리의 존재에 주목하게 한다. 마치 물감을 통해 액체의 형태가 드러나듯이 사물은 보이지 않는 것의 형태를 그러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사물과 그 생성과정에서의 소리를 병치함으로서 작가는 사물이 갖고 있는 시간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때로는 이 조합이 현상적으로 드러나고 때로는 조금 더 서사가 발견되기도 한다. 허나 그 전반적인 톤을 조절함에 있어 작가는 채집한 사물의 소리이든, 사람의 목소리이든 모두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환경으로 읽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들은 어떤 부드러운 목소리들처럼 온화하다. 번잡한 사건도 하나의 소리로 흘러가버리고, 소리와 사물의 연결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배반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지나친 기이함은 없다. 모든 소리를 하나의 환경으로서 수합하는 것, 즉 메시지의 부분을 갈아내어 유사한 층위의 질감에 나란히 놓는 것은 평정심을 읽게 한다. 그 평온함이 아름답지만, 잔잔한 호수에서 파동을 보고 싶은 다소 심술궂은 마음도 생긴다. 소리가 갖고 있는 메시지는 더욱 더 비틀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안온한 곳에서는 언젠가 서늘한 긴장과 불온이 기어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2017